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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VAGE 사례로 배우는 지식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 유한양행 유일한 회장이 CIA 요원이었다고?! 냅코 프로젝트 뜻, 암호명 A 유일한

by 시구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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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VAGE_사. 배. 지_사례로 배우는 지식

 

안녕하세요. 시구입니다.

 

오늘은 '냅코 프로젝트'란 실제 존재했던 작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시간은 19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냅코 프로젝트 기안서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

개요

1944년 말, OSS의 워싱턴 본부는 냅코프로젝트라는 계획을 구체화시킵니다. 이 같은 계획은 OSS의 부책임자 굿펠로우의 제안과 101부대 책임자 아이플로의 실행으로 구체화됩니다.


I. OSS란?

OSS와 CIA의 로고

한반도침투계획을 기획한 OSS는 '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약자로 한글로 번역하자면 전략첩보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중에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령으로 COI(정보조정국)가 설립되는데요. 이를 발전시켜 1943년에 조직된 미국 정보기관입니다.

 

 

 

OSS는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럽과 아시아에서 활약하였고, 종전 후에는 일시적으로 기능이 군과 국무성에 분할되었다가, 1947년에 다시 CIA(중앙정보국)로 재현되었습니다.


II. 냅코 프로젝트 뜻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 CIA의 전신인 워싱턴 OSS에서 일본을 상대로 한 비밀첩보작전.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한국에 고난도 훈련을 받은 최정예 특수요원들을 투입해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거점을 확보해 일본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목적.

 

OSS 워싱턴 본부 냅코 프로젝트 책임자이자 이 작전을 지휘한 아이플로 대령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서'냅코'가

무슨 뜻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Kidnap Korea, 한국을 납치하다'는 의미로

'냅코 프로젝트'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당시 극비 작전명은 아무거나 붙이는 경우가 많았기에, '냅코(NAPKO)'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III. 냅코 프로젝트의 경과

아이플로 대령이 도노반 OSS 국장에게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냅코프로젝트의 목적은 "한국 내 당장 침투할 수 있게 준비하고, 궁극적으로 일본에 침투하여 첩보 지하조직 조성 등의 활동을 하고, 사보타지와 무장 저항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5명 이내의 10개 조를 파견하고,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 훈련 과정에서 매조의 인원은 다른 조의 신원을 서로 모르는 상태를 유지하였습니다.

 

 

 

공작원들이 한국에 상륙할 때, 1500엔(현재 가치로 약 1만 5000달러)을 소지해 활동하게 하고, 잠입은 잠수함을 이용하고, 반일감정이 농후한 지방을 선택해 지하훈련소를 만들고, 무장 유격활동을 전개한다는 방침이었습니다. 공작원의 침투는 인천 앞바다 섬들을 통한 서울 침투, 진남포주 경유 평양 침투, 평남주 농촌 침투, 충남 서산 침투, 진남포 경유 황해도 침투, 전남 목포 앞바다의 목포 침투 등 여러 조를 계획하였습니다.


IV. 냅코 프로젝트의 구성원

냅코 프로젝트 구성원, KBS NEWS 유튜브 캡쳐

현재까지 밝혀진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한 요원들은 장석윤, 박기벽, 이태모, 이초, 최창수, 유일한, 최진하, 이근성, 변일서, 김강, 변준호, 차진주, 하문덕, 박순동, 이종실, 박형무, 김필영, 김현일, 이종흥입니다.

 

19명 중 김강, 변준호, 이근성, 유일한, 최진하는 재미한인사회의 중추적 인물이었는데요. 이들은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이번 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김필영, 김현일, 이종흥은 황해도 출신의 노무자이자, 맥코이포로수용소의 한인 포로입니다. 박순동, 박형무, 이종실은 버마 전선의 일본 군대에서 탈출해 영국군에 투항한 학병 출신이며, 이들을 통역으로 도운 최창수와 하문덕은 OSS 출신입니다.

이들을 연령별로 분류하면 20대 3명, 30대 8명, 40대 6명, 50대 2명이고, 이들 중 기혼자는 13명, 미혼은 6명이었습니다. 즉, 대부분 중장년인 데다, 안정된 가정을 누릴 만한 연령과 계층의 인물들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참여한 것입니다.

 

 

 


V. 냅코 프로젝트 훈련 과정과 각 조의 역할

공작원의 교육 내용은 사격, 비무장 전투법, 지도 읽기, 파괴, 무전, 촬영, 낙하산 훈련, 비밀 먹 사용법, 선전, 일본인의 특성 교육 등이었습니다. 공작원의 훈련은 다음과 같이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진 4개 조로 나뉘어 진행되었습니다.

 

아이넥조(Einec) = 유일한(조장), 이초, 변일서, 차진주, 이종흥
목표는 서울 침투, 경제상황과 일본군 부대의 주둔 위치를 파악·보고

차로조(Charo) = 이근성, 김강, 변준화
목표는 진남포 경유 평양 침투

무로조(Mooro) = 김필영, 김현일, 박순동, 박형무, 이종실
목표는 황해도 앞바다의 작은 섬으로 진입해 거점을 확보

차모조(Chamo) = 이근성, 김강, 변준호, 하문덕
이근성과 김강의 목표는 평양에서 지하조직을 만든 후, 서울로 가 일본 침투 공작원을 선발
변준호와 하문덕의 목표는 함흥 인근의 계곡에 비행기 이착륙용 활주로와 공작원양성소를 설립해, 흥남으로 진출

 

 

 

차모조는 당초 계획한 차로조의 임무가 약간 전환된 것입니다. 4개의 공작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침투지점과 방식, 공작원의 수와 구성 등에서 변화를 겪었습니다. 아이플러의 구상은 당초 10개 조를 한국에 침투시킬 계획이었는데, 이 가운데 7개 조가 성공하고, 나머지 3개 조는 체포될 것으로 예상하였다고 합니다.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인 공작원들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산타 카타리나섬 안에서 고되고 힘든 훈련을 3∼4개월 동안 받았습니다. OSS는 이들을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로 데려가 실제로 가상 침투훈련을 실시하였고, 2만 달러를 들여 침투용 잠수정을 제작해 훈련에 사용했습니다. 그 외 이들이 받았던 훈련의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유격훈련, 사격훈련, 정보수집을 위한 무선교신, TNT폭파, 나침반 사용, 지도해독법, 지도 작성, 공중 폭파, 지뢰 설치, 자동차 엔진 파손법 등등

VI. 냅코 프로젝트의 결과

냅코프로젝트는 1944년 7월에 장석윤의 참여로 시작된 후, 4개의 침투조로 편성되어 1945년 8월까지 계속됩니다. 이후 냅코 프로젝트의 실행일은 드디어 1945년 8월 18일로 정해집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하지만 미국은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결사항전을 외치던 일본은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게 되는데요. 이로 인해 한국은 갑작스럽게 광복을 맞게 되었고, 미국은 모든 대일작전을 취소합니다. 그리고 산타 카타리나 섬에서 한국에 침투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19명의 한국인 요원들에게도 해산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고작 작전 3일 전에 해산 명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포로를 전쟁에 활용하는 것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었기 때문에 이를 숨기기 위해서, 미군은 버마 탈출 학병과 맥코이 포로수용소 출신 한인들은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도로 수감시키게 됩니다. 일본을 상대로 함께 싸우던 전우라 생각했던 미군이, 하루아침에 자신들을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수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때문에 냅코 프로젝트는 1급 기밀로 분류되었으며, 30년이 지난 뒤에야 밝혀지게 됩니다.

 

 

 


VII. 냅코 프로젝트 암호명 A, 유일한 회장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
회사 간부들 역시 한인 애국자들로 채웠다.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적의 핵심으로 운영할 계획이었던 것.

따라서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 조직망을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

- 당시 OSS 훈련 책임자

냅코 프로젝트 요원이었던 유일한 회장의 이력서

냅코 프로젝트에 선발된 인원들은 이름이 아닌 암호명 A, B, C, D 등으로 불렸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 이는 개개인의 신원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함인데요. 여기서 암호명 A유한양행의 유일한 회장입니다. 그는 무려 50세의 나이에 OSS의 지휘 아래 강도 높은 군사, 첩보훈련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회사 전체를 독립운동에 쏟아부으려 했습니다.

 

유일한 회장은 살아생전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실을 일절 함구하여, 동생 유특한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유일한 회장이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단 사실은 그의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밝혀졌습니다.

 

할아버지께서 OSS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굉장히 놀랐어요.
왜냐하면 단 한 마디도 안 했거든요.
훈련받을 당시 비밀보장맹세를 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훈련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로요.
놀라운 것은 할아버지와 다른 사람들 모두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마디도 안 했다는 거죠.

- 유일한 회장의 손녀 유일링의 2017년 인터뷰 중

 

 

 


글을 마치며

재미한인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인터뷰를 보면, 다들 엄격했던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다가, 80살이 넘어서 아버지 대신 독립유공자상을 받게 되는데, 이에 아버지가 독립운동 비밀유지 때문에 자식에게 엄격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당신의 선택은?

지금의 가치관과 신념의 크기로 당시에 대입하는 것은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편하고 안락한 세상이 도래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만약 그 시대에 태어났고 나라가 없어져도 평생 먹고사는데 아무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상상해 본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한양행의 유일한 회장은 정말로 너무나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경영권을 승계하려고 온갖 꼼수만 써대는 이 시대의 배불뚝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참 기업인이며, 현재까지도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고 계시죠.

 

이제 포스팅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조금이나마 흥미진진하고 유익한 시간이 되셨길 바랍니다. 저는 다음 시간에도 역시 재미난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소중한 시간 내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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