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행착오/SAVAGE 사례로 배우는 지식

잊혀진 비극, 밀리환초 사건: 그 진실을 밝히다

by 시구몽 2024. 6. 10.
반응형

「SAVAGE_사. 배. 지_사례로 배우는 지식

안녕하세요. 시구몽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밀리환초 사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인이 조선인에 인육 먹이고 집단학살"
80년간 한국인도 몰랐던 '밀리환초 사건' 참상


밀리환초 사건의 모든 것

I. 밀리환초 사건 개요

밀리환초 사건: 1945년 2월 태평양 남양군도 밀리환초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

1942년, 일본 제국은 마셜 제도에 비행장과 군사시설을 지었지만,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한 후, 마셜 제도 상륙작전(부싯돌 작전)에서 미군이 콰잘린 환초를 기습점령하고 나서, 콰잘린 비행장을 기점으로 미군의 봉쇄작전이 시작되었고, 섬 자체도 산호초였기 때문에, 토질이 좋지 않아 둔전을 할 수 없었으니 식량이 늘 부족했습니다.




1944년 6월, 설상가상으로 미군이 마셜 제도의 대부분의 섬을 점령한 후에는 미군의 봉쇄작전이 심해지면서, 섬에는 식량 보급이 끊겼습니다. 그래서 병력을 섬 전역에 분산시켜 가면서 자력갱생을 도모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전시였기 때문에, 미군은 고기잡이를 나온 일본군에게 거침없이 기관총 사격을 가했고, 선전방송까지 곁들여 속을 박박 긁어 댔습니다. 이렇듯 일본인과 조선인을 막론하고 굶주림이 심화되자, 혹독한 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의 불만도 고조되어 갔습니다.


II. 조선인 학살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던 가운데, 어느 일본군이 웬일로 자신이 먹던 고래고기를 지나가던 조선인 군속에게 선심 쓰듯 나누어 주었습니다. 조선인들은 저 사람들이 갑자기 웬일이지 싶기도 하면서, 이것을 의심하지 않고 먹었지만, 며칠 뒤 무인도로 고기를 잡으러 간 조선인들은 섬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살점이 도려내진
조선인들의 시체
목격한 것.

 

1945년 2월 28일, 결국 이대로 가다가는 몰살을 면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밀리환초 내 체르본섬에 살던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은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감시하던 일본군 감시인 11명을 살해한 뒤 미군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하고, 이들을 숲으로 유인한 뒤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11명 중 7명만 살해했고 4명은 끝내 놓치고 말았는데, 이는 다음날 끔찍한 결말로 돌아왔습니다.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일본군 15명 체르본 섬에 상륙해 섬 안에 있던 조선인 100여 명을 학살한 것입니다. 더불어서 15명의 원주민들도 조선인들에게 가담했다는 혐의로, 학살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조선인들이라고 당하고만 있지 않았고, 둔기나 곡괭이를 휘두르거나 돌과 다이너마이트를 던지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상대가 될 리가 만무했고, 결국 전부 처참하게 학살당했습니다.


III. 육해군 내전

일본군의 만행과 충격적인 일화는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인육 사냥은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같은 일본인까지 대상으로 했습니다.

 

일본군 장병들 중 가장 희생이 많았던 것은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편성되었던 일본 육군 보병 제107 연대 제3대대였습니다. 이 부대가 파견되었을 때는 이미 3,000명 이상의 일본 해군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심각하던 차에, 식량 보급까지 끊기면서 육해군은 서로 진짜 적대관계가 되었습니다. 식량을 훔친 장병이 사살되는 건 기본이고, 해군이 지하호에 감추어둔 식량을 육군에게 나누어주지 않자, 아예 상호 간의 총격전까지 발발했습니다. 육군들끼리도 식량 배분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졌고, * 프래깅과 자살이 빈번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막장으로 흘러가면서, 같은 일본인이고 뭐고 서로 잡아먹는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 군대 내에서 아군에 의한 고의적인 살해

밀리환초에
미군이 상륙한 적이 없음을 생각하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참극.


전후, 복원선 에이가와 마루에는 대대 총원 1,000명 중 300명이 채 안 되는 사람만 탈 수 있었습니다.


IV. 기타

한편, 이웃한 윗제 환초에서도 식인 사건이 빈번했습니다. 일본군 제7포 대원들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으로, 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실종되고, 인육에 대한 소문이 무성해지던 상황에서, 1945년 5월~6월 사이에 덜미가 잡혀, 인간 사냥꾼 전원이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이 충격적인 사건마저도 뒤에 일어난 * 치치지마 식인 사건 때문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밀리 환초는 기아 때문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치치시마는 그런 문제도 없이 단순히 재미로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 다치바나 요시오의 휘하 부대가 1945년 2월경,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지마에서 산 사람을 일부러 살해하고, 그 시신을 먹은 식인 사건




2006년에 설치된 대한민국 정부의 강제동원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생존자들의 증언 등을 종합해,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아무런 입장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2010년, 국무총리 산하 한시조직으로 활동했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 의해 경위와 피해자의 본적 등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그러나 위원회의 직권조사 결과, 대부분의 사망 피해자가 전남 출신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조차 사건이 알려지지 않아 재조명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2024년 6월 7일, 일제강제동원 시민모임은 광주시의회에서 '밀리환초 조선인 학살 사건' 고발 기자회견을 개최했습니다. 회견에서는 일본 강제동원 연구자이자 사학자인 다케우치 야스토 씨가 주요 발언자로 나섰습니다. 이날, 이들은 "조선인들의 저항 과정과 이에 대한 일본군의 학살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과 함께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이 필요하다"라고 밝혔습니다.

연구자인 다케우치 야스토 씨는 '해군 군속 신상조사표'를 바탕으로, 밀리환초 사건 관련 생존자가 95명, 사망자가 55명이라며, 이 가운데 총살에 의한 사망이 32명이며 자결한 희생자는 23명이라고 밝혔습니다. 사망자 55명 중에는 담양 출신이 25명으로 가장 많고, 그 외에 광양 7명, 고흥 5명, 순천 4명, 광산 4명, 화순 3명, 보성 3명, 광주 2명, 무안 1명, 나주 1명 등 모두 전남이 본적지입니다.


다케우치 야스토 씨는 "과거 대한민국 정부가 일부 진상규명을 했지만 피해 실태가 전부 알려지지 않았다"며, "진실이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는다면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일제강제동원 시민모임은 진상규명과 함께 피해자들의 본명과 밀리환초에 동원된 이유를 밝히고 명예회복과 추도·기념·역사계승 등을 촉구했습니다.


오늘 포스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남은 하루가 행복하시길 바라며, 소중한 시간 내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