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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착오/SAVAGE 사례로 배우는 지식

현대 마케팅의 창시자: 에드워드 버네이스와 대중 설득의 예술

by 시구몽 2024.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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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VAGE_사. 배. 지_사례로 배우는 지식

 

안녕하세요. 시구몽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에드워드 버네이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dward Louis Bernays 에드워드 루이스 버네이스


PR의 아버지: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혁신적인 홍보 전략

I. 개요

The father of public relations
홍보의 아버지

 

유대계 미국인 마케터.

 

홍보(PR, Public Relations) 및 선전(Propaganda) 분야의 선구자였습니다. 버네이스는 라이프지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선전이 잡부의 일로 취급되던 시대에 세계 최초의 PR 에이전시를 세운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의 심리, 그중에서도 집단 심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는데, 이를 마케팅에 접목시킨 것이 바로 선전과 이를 체계화한 PR이었습니다. 또한 1923년, 뉴욕대학교에서 최초로 '홍보' 교과 과정을 개설하여 PR을 과학이자 산업으로 정립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버네이스가 만들어낸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아주 훌륭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한편으론 과테말라 민주 정부의 전복에도 큰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II.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생애

1891년 11월 2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곡물상으로 성공한 유대인 일라이 버네이스의 아들로 출생했으며,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친조카이자 처조카)입니다. 거기다 증조할아버지였던 이츠하크 버네이스는 함부르크의 최고 랍비였으며,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와 친척이었습니다.

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자랐습니다. 대학은 코넬 대학교에서 농학을 전공했습니다.

 

1912년,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시 상품거래소에서 전공을 살려 곡물 유통 업무를 하다가 그만두고, 친구의 의학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홍보(PR) 업무를 시작했는데, 언론 대행인으로서 여러 문화 행사를 성공리에 이끌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버네이스는 선전·홍보 분야에 자신의 적성을 깨닫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연방공보위원회(CPI)에 발탁되어 독일 등에 맞서 뛰어난 선전 전략을 펼쳤습니다.

전후 1919년에는 뉴욕에서 세계 최초로 'PR 고문'이라는 직함을 달고, PR 전문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대중심리학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결합하여 최초로 선전과 홍보에 이용했고 홍보를 과학으로, 산업으로 정립했습니다.

1923년에는 뉴욕 대학교에서 최초로 '홍보'라는 교과과정을 가르쳤고, 최초의 PR 전문서인 「여론 정제(Crystallizing Public Opinion)」도 출간했다.

 

1995년 3월 9일, 103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수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그를 'PR의 아버지'로 기렸습니다.



그는 거의 반세기 동안 435명의 의뢰인에게 PR 자문을 했는데, 의뢰인 명단에는 대통령부터 노동조합에 이르기까지 미국 정계·재계·교육계·언론계·문화예술계 등을 대표하는 유명 인사와 기업·기관과 단체가 망라됐습니다. 저서로 「프로파간다(Propaganda)」·「홍보(Public Relations)」·「합의의 조작(The Engineering of Consent)」 등이 있습니다.


III.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대표적 사례

버네이스의 사례를 잘 검토해 보면, 물건 자체를 홍보하기보다는 물건이 저절로 판매되는 '환경 자체'를 만드는 것을 중요시했고, 광고는 선전의 큰 체계 속에서 직접 물건을 소개하는 하위 분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사람들 마음속에 '집단 습관(Group Custom)'을 심으면 물건은 저절로 잘 팔릴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아래의 예시와 함께 그의 저서 「프로파간다」에서는 여러 가지 선전의 기술이 나오는데, 지금 보면 진부한 내용도 있지만, 1928년에 발간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혁신적인 내용입니다.


여성 머리망 판촉

베니다 헤어넷 머리망

1920년대 머리카락, 특히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감싸는 머리망을 만들던 '베니다 헤어넷 (Venida Hair Net)' 회사는 버네이스에게 머리망 판매 촉진에 대한 전략을 의뢰하였습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당시 최악의 화재사건이었던 뉴욕 트라이앵글 의류공장 화재사고였습니다. 이 참사로 단 15분 만에 146명이 사망하였는데, 모두 여성이었습니다.

뉴욕 트라이앵글 의류공장의 직원들, 그리고 비극적인 화재 사건

버네이스는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이 여성 노동자들에게 매우 위험하다는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이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베니다의 머리망을 구매하기 시작하였고, 곧 전체 여성들 사이에서 머리망이 유행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부에서도 이 머리망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검토하였고, 마침내 여성근로자들은 공장에서 머리망을 착용해야 한다는 법이 통과되었습니다.

 

베니다의 머리망이 이제 법적 의무가 된 것입니다. 물론, 매출은 급격히 상승하였습니다.




아이보리 비누 판촉

1897년에 P&G에서 출시한 아이보리 비누는 '물에 뜨는 비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농가에서는 개울에서 빨래하고 몸도 씻는 경우가 많았는데, 물에 뜨는 비누는 분실 우려가 적고 개울에서 사용하기도 편리했습니다. 그러나 시장은 금세 포화상태에 다다랐습니다.

 

1924년, P&G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버네이스를 찾습니다.

버네이스는 누가 비누를 가장 싫어할지를 먼저 생각해 보았습니다. 답은 아이들이었습니다. 버네이스는 아이들이 비누에 친숙해지면, 씻는 횟수도 획기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버네이스는 '비누 조각품 경연대회'를 열었습니다. 첫 번째 대회의 참가 자격은 예술가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수상작은 뉴욕을 비롯해 각지 박물관과 미술관에 순회 전시되었습니다.

비누 조각품 경연대회 우승작

두 번째 대회부터는 초등학생까지 참가자격을 넓혔습니다. 예술가들만 참여하는 대회에 아이들도 참가할 수 있게 되자, 부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녀들을 참가시켰습니다.

아이도 부모도 비누 조각에 열광했습니다. 대회는 매번 성공적으로 치러졌습니다. 대회에 사용된 비누는 전량 아이보리 비누였지만, 대회 어디에도 상업적인 흔적은 없었습니다. 비누 조각품 경연대회는 미국 전역을 휩쓸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버네이스는 이후 30여 년간 P&G의 PR을 전담하게 됩니다.


아침 영양식으로 각인된 베이컨 판촉

1920년대 중반, 미국 베이컨 제조회사인 비치넛 패킹(Beechnut Packing) 사장은 버네이스를 찾아가, 업계 꼴찌인 자신의 회사를 살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물론 버네이스는 역시 다르게 생각하였습니다. 경쟁 회사를 제치고 업계 1위가 되는 것보다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여 시장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간단한 아침이 인기였고, 베이컨은 아침 식사로 인기 있는 메뉴가 아니었습니다.

베이컨 캠페인

이에 버네이스는 내과 의사들을 대상으로 행한 간단한 설문 조사를 통해, '내과 의사들은 든든한 아침 식사를 선호한다'는 뉴스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기사를 배치베이컨과 달걀이 중요한 아침 식사 메뉴 중 하나임을 부각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에서 베이컨의 소비는 급증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권위에 의지하게 하는 몇 가지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당시, 설문 대상은 내과 의사였지만, 내과 의사들에게 베이컨을 아침 식사의 대용으로 선호하는지는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가벼운 아침 식사보다는 든든한 아침 식사가 밤사이 잃어버린 에너지를 보충하는 데 더 좋다는 답변만을 유도했을 뿐입니다.




여성 흡연 캠페인(자유의 횃불)

1929년, 미국의 담배 회사 아메리칸 토바코(American Tobacco)사는 당시 이미 마케팅 시장에서 유명해진 버네이스를 스카우트했습니다.

역시 버네이스는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담배를 직접 광고하기보다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 곧 당시의 여성들에게 주목했습니다. 20세기 초 흡연은 남자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버네이스는 이것을 이용하여 여성 흡연 마케팅을 시작한 것입니다. 즉, 여성에게 여성은 흡연에 있어 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입시킨 것입니다.

그 시절에 나온 담배 광고 "구닥다리 편견은 그만!"

버네이스는 사교계에 입문한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길거리에서 공공연히 흡연을 하며 행진을 하게 했고, 부활절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에 불을 붙이라고 설득하였으며, "여성들의 노상 흡연을 허락하라!"와 같은 슬로건을 제작했습니다.

 

버네이스는 한편으로 방송에 출연하여 "이들이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에 붙이는 불은 단순히 담뱃불이 아니라 여성들의 참정권과 같은 인권 운동에 있어 자유의 횃대에 불을 붙이는 횃불이다"와 같이 멋들어지게 포장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담뱃갑의 짙은 녹색 색깔에 여성들이 호감을 갖게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패션 업계까지 휘저어서, 최신 패션 트렌드를 짙은 녹색 옷차림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버네이스가 만들어 낸 환상은 여성이 담배를 피움으로써 더 강해지고 독립적이 된다는 환상이었습니다. 물론 흡연이 실제로 여성을 더 자유롭게 만든다는 생각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지만, 여성들은 담배를 피움으로써 더 독립적인 기분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마케팅은 대성공했고, 담배 시장은 훨씬 커졌습니다.


과테말라 쿠데타

무슨 홍보 전문가가 과테말라 정부를 전복했을까 싶지만, 버네이스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독재 정부와 결탁해 현지인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과일회사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FC, United Fruit Company)는 1950년,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이 과테말라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경작하지도 않으면서 가지고 있던 땅 40만 에이커(서울시 면적의 약 2.7배)를 압수당하였습니다.

이에,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버네이스에게 의뢰를 하고, 역시 버네이스는 언론을 이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좌파 정권의 위험성만을 부각해 윤색한 보도자료를 미국 언론에 제공하고, 주요 신문의 기자와 칼럼니스트를 모아 현지 취재 일정을 짜주고 여행을 금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과테말라 정부 지도자들의 언어를 분석한 결과, 17,000개의 단어가 소련 선전 메시지와 비슷하더라'는 학자들의 조사 결과도 만들어냈습니다.

그 결과, 미국 여론은 급격하게 과테말라 정권에 불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1954년 6월, 망명 인사인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가 미국 CIA가 훈련시킨 200명을 이끌고 온두라스 쪽에서 국경을 넘었습니다. 이 침공으로 과테말라의 구스만 정권을 전복시키고, 아르마스가 이끄는 친미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이는 모두 그가 홍보를 담당했던 유통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벌인 일이었기에 일각에서는 버네이스를 가리켜 선전과 홍보의 아버지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암살자'로 부르며 비판하기도 합니다.


글을 마치며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단순히 PR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의 소통 방식과 마케팅 전략의 기초를 닦은 혁신가였습니다. 그의 심리학적 접근과 대중 설득의 기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버네이스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대중과의 소통이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복잡한 심리적 상호작용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소비자의 무의식을 자극하고, 이를 통해 행동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마케팅과 홍보의 방향성을 제시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광고와 홍보 전략 뒤에는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실험이 숨어 있습니다. 그의 유산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전략과 접근 방식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것입니다.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길을 제시한 선구자입니다. 그의 업적을 되새기며, 우리는 대중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이 글이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업적과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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