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행착오/SAVAGE 사례로 배우는 지식

[영수회담] 정부와 국회 일인자 간의 만남|영수회담 뜻|영수회담 사례

by 시구몽 2024. 5. 1.
반응형

「SAVAGE_사. 배. 지_사례로 배우는 지식

 

안녕하세요. 시구몽입니다.

 

오늘은 '영수회담'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2024년 4월 29일에 실시된 이재명과 윤석열의 영수회담


[영수회담에 대한 모든 것]

I. 영수회담 뜻, 영수 뜻

영수회담(領袖會談)이란,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입법부의 제1야당 대표(구 총재) 간의 회담을 의미합니다.

*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을 '야당'이라고 하며, '여당'은 야당은 제외한 정당들을 모두 일컫는 말.

** 예전에는 정당의 대표를 총재라고 불렀으나, 본 포스팅에서는 총재라고 부르던 때도 편의상 '대표'로 통일하였음.

 

영수는 어떤 집단에서 특별히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영수회담은 국가나 정치단체 또는 어떤 사회조직의 최고 우두머리가 서로 만나서 의제를 가지고 말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한국 정치에서 영수회담이란 단어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의 양자회담'만'을 의미합니다. 과거에는 대통령이 여당 대표를 겸하는 경우가 보통이었으나, 참여정부 이래로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분리되는 게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당의 실질적 일인자는 여전히 대통령이다 보니, 일반적으로는 여당 대표와 야당 대표의 회담을 영수회담이라 부르지 않는다.

다당제 구도였던 노태우 정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문재인 정부에서는 1:1 만남뿐만 아니라, 원내 정당 대표들을 모두 초대하는 대표 회담을 하기도 했는데요. 물론, 이 경우는 영수회담이라고 일컫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정치적 난국에 봉착했을 때 야당의 대표들과 회담하여 국정을 풀어가는 것이 역사적 관습으로 존재했습니다. 회담 장소는 대통령의 집무 공간이 되는 청와대에서 열렸습니다. 식사를 겸해서 회담하는 경우도 있었고, 차담회 형식으로 회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차담회: 차를 마시며 담화를 하는 가벼운 회의


II. 영수회담의 의미

대통령이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권위주의 체제 시절에 영수회담은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영수회담이 아예 없었고,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총 5번 열렸지만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전두환 정부 들어서는 한 번도 열리지 않다가, 87년 6월 항쟁이 거세지고 정국이 급박히 돌아가고 나서야 한번 열렸습니다.

 

 

 


영수회담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진 시기는 8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노태우 정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시기였다. 즉, 3김시대였는데요. 이때에는 영수회담뿐 아니라, 당대표 간 다자회담도 많이 열렸습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시기였던 동시에, 카리스마적 보스가 당을 장악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대통령은 여당 대표를 겸임했고, 야당 대표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보스였습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보스들끼리 통 큰 타협을 통해, 여소야대 정국의 어려운 매듭을 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여정부 이후 영수회담은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영수회담이 열리더라도, 과거와 같은 통 큰 타결은 보기 어려워졌는데,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더 이상 대통령이 여당 대표를 겸임하지 않아 당정분리가 자리 잡으면서, 대통령이 여당 대표를 패싱하고 야당 대표와 대화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 시각이 만들어졌습니다.
  2. 여야 모두 정당민주화를 통해 당대표가 당무, 원내대표가 원내현안을 각각 담당하는 이원화된 체제로 재편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영수회담은 원내대표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으로 비치게 되었습니다.
  3. 정당민주화로 인해 진성당원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사회 전반에 걸쳐 이념갈등과 진영논리가 극심해졌습니다. 따라서 여야 당대표가 함부로 협상하고 타협하면 당원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4. 진보정당 중심으로 영수회담은 군소정당을 무시하는 구시대적 정치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었습니다.
  5. 영수회담 자체가 권위주의적이라는 인식이 커졌습니다.

80, 90년대처럼 중요한 현안을 영수회담에서 단칼에 해결하기는 어렵지만, 영수회담은 여전히 그 자체로서 정부와 야당이 서로 소통하는 최고 수준의 자리라는 정치적 의미가 있습니다. 대통령은 야당 지지자들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있고, 야당은 대통령에게 핵심 의제들에 대한 결단을 요구하고 압박하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영수회담의 정치적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III. 우리나라 영수회담 사례

참고로 아래 영수회담 횟수는 언론에서 명시한 것들만 카운팅 하였음. 실제로는 더 많을 수도 있음.

이승만(0회)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영수회담이라는 개념이 없었음.


박정희(5회)

  • 1965년 7월 20일, 박순천 민중당 대표 - 헌정사상 최초의 영수회담.
  • 1970년 8월 29일 등, 유진산 신민당 대표(2회)
  • 1975년 5월 21일, 김영삼 신민당 대표 - 박정희 시절에 있었던 영수회담 중 가장 유명한 영수회담.
  • 1977년 5월 27일, 이철승 신민당 대표

박정희와 박순천
박정희와 김영삼 대표


최규하(1회)

  • 1980년 2월 18일, 김영삼 신민당 대표

전두환(1회)

  • 1987년 6월 24일, 김영삼 통일민주당 대표 - 결과적으로 5일 뒤 6.29 선언으로 이어지는 회담.

전두환과 김영삼 대표


노태우(2회)

  • 1988년 8월 31일, 김대중 평화민주당 대표
  • 1990년 1월 11일, 김대중 평화민주당 대표

김영삼 대통령(2회)

  • 1994년 3월 11일, 이기택 민주당 대표
  • 1996년 4월 18일,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표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표


김대중 대통령(8회)

  • 1998년 2월 27일, 조순 한나라당 총재
  • 1998년 11월 10일 등,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7회) - 가장 많이 시행되면서 민주화 이래 가장 성과가 큰 영수회담.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노무현 대통령(2회)

  • 2005년 9월 7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 노무현 대통령이 앞서 제안했던 대연정에 관한 회담
  • 2007년 2월 9일,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 대연정: 이념이 다른 둘 이상의 정당이 연합하여 함께 정부를 구성하는 것.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이명박(3회)

  • 2008년 5월 20일,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
  • 2008년 9월 25일, 정세균 통합민주당 대표
  • 2011년 6월 27일, 손학규 민주당 대표

박근혜(0회)

양자회담은 없지만 다자회담은 여러 번 가졌음.


문재인(1회)

  • 2018년 4월 13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윤석열(1회)

  • 2024년, 4월 2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 본 포스팅을 작성하는 2024년 5월 1일 현재까지 1회, 이후 윤석열이 또 영수회담을 실시할 경우 변동될 수 있음.


글을 마치며

가장 최근의 영수회담은 윤석열이 여태 8번을 거절하다가 이제야 받아주었고, 마지못해 실시한 영수회담에서도 경청하는 척만 하는 등 평행선을 달렸다는 비판들이 많습니다.

 

또한 일각에서는 윤석열이 이재명을 맞이하는 태도, 회담 테이블의 크기 등 형식적인 요소까지 비판하기도 하는데요. 정말 꼰대스럽기 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실 영수회담이란 것 자체가 지극히 꼰대들의 정치 문화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때다 싶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는 야권의 모습도 참 한심한 것 같습니다.

 

혹자는 이런 양비론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떠들어대지만, 도무지 안 그럴 수가 있어야지요. 제발 양당 중 누구 하나라도 좀 더러운 짓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이쁜 짓들을 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마지막에 급발진을 하였네요. 오늘 포스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남은 하루도 힘내시길 바랍니다. 소중한 시간 내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응형